충신열사 : 동래부사 송상현공

출생지 / 여산

동래읍성 전투에서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자(字)는 덕구(德求)요, 호(號)는 천곡(泉谷)이라 하였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그의 증조부 승은(承殷)은 선략장군부사맹(宣略將軍副司猛)으로 좌통례(左通禮)의 벼슬을 증직하였고, 조부 전(琠)은 진용교위(進勇校尉)로 좌승지(左承旨)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아버지 복흥(復興)은 송화현감(松禾縣監)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의 벼슬을 증직하였고, 어머니 김씨(金氏)는 정부인(貞夫人)을 증(贈)하였다. 이는 모두 송상현의 벼슬이 추증되면서 주어진 것이다. 그의 12대 할아버지인 송례(松禮)는 고려 때 벼슬이 시중(侍中)까지 이르는 고려 왕조의 명신(名臣)이었다.

송상현이 태어난 것은 1551년(명종 6) 1월 8일이고, 어려서부터 남달리 뛰어난 재주로 글을 읽어 10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 : 성균관 대사성이 사학(四學)의 유생(儒生)에 대하여 매년 시험을 쳐서 성적이 우수하면 식년(式年)의 소과시험에 응시토록 한 것]에 장원하니 시험관도 그의 앞날을 촉망하였다. 1570년(선조 3) 20세의 나이로 진사(進士)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보임되었다. 1578년에 저작랑(著作郞)이 되고, 이듬해에 박사(博士)에 승진하여 승정원 주서(注書)겸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서임되었다가 나아가서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었다.
1583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돌아와 예조(禮曹), 호조(戶曹), 공조(工曹)의 정랑(正郞)이 되었다. 이듬해인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6년에도 또 한 번 중국을 다녀온 뒤 다음 해에는 사헌부 지평에서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에 좌천되었다.
1587년에 다시 들어와 지평(持平)이 되고, 이듬해에 백천군수(白川郡守)로 나가 3년만에 전직되어 들어와서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사재감ㆍ 군자감 정(司宰監ㆍ軍資監正)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에 집의(執義)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동래부사가 되니 곧 임진란 바로 전년이었다.

이 당시 조정에서는 당파(黨派)가 동서로 분열되어 국론(國論)이 통일되지 않고 혼란중에 있었다. 송상현은 장차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며 불의에 흔들리지 않았다.

1586년경부터 이미 왜국과 관계가 심상치 않았는데 동래는 왜적이 침입하는 첫 상륙지가 되므로, 조정에서는 문과 무의 재주를 겸비한 송상현을 동래부사로 보내었으나, 실은 그 처사가 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한다. 이것은 송시열(宋時烈)이 쓴 신도비문(神道碑文)에서 「공은 벼슬길에 올라서 바르고 곧았으므로 늘 미움을 사게 되었는데…….」라고 한 것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송상현은 동래에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직무를 수행함에 오직 성의와 신의로써 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따르기를 마치 부모와 같이 하였다.

남달리 명철했던 그는 동래로 부임해 올 때 마음 속에 굳게 다짐한 바가 있었다. 국론이 분열되어 정세가 어수선하니 왜적이 반드시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이다. 만약 그들이 내침할 경우 죽음으로써 이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뜻을 당시 정산수령(定山守令)으로 있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시(詩)로 지어 알렸더니 김장생도 그 충성스러운 기개를 흠모하여 그 시를 관아의 벽에 새겨 두었다는 것으로도 그의 결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부임한 바로 다음 해인 1592년 임진년 4월 13일에 왜적이 물밀듯이 부산 바다에 몰아 닥쳤다. 14일에 부산이 함락됨에 부산진첨사 정발(鄭撥) 장군이 장렬한 전사를 했고, 그 날로 왜군이 동래읍성으로 진군했다. 이에 앞서 울산 병영(蔚山兵營)에 있던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은 이 지역이 좌병사의 관할 구역이므로 군사를 이끌고 동래읍성으로 들어와 함께 성을 지킬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적이 부산에서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는 보졸 수백 명을 내어 조방장(助防將)으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다. 조방장이 남으로 10리 가량 갔다가 돌아와 말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도저히 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각이 「부사는 마땅히 이 성을 지켜야 할 것이요. 우리는 뒤에서 계속 후원할 것이다.」라면서 조방장과 함께 달아날 뜻을 보이자 송상현은 의리로 책망하고 죽음으로 이 성을 지키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각은 「나는 내 진영이 따로 있으니 이곳은 나의 관할 구역이긴 하나, 이 성을 지키는 것은 그대의 책임이라.」하고는 노약한 군졸 30여명을 내어 주고 기어이 북문을 열고 소산역(蘇山驛)으로 도망갔다.

송상현은 크게 탄식하였으나,「나라에서 나에게 이 성을 맡겼으니 내가 살고 성이 함락될 수는 없다. 나는 성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다.」고 결의를 굳게 다졌다. 그는 군중들 앞에서 죽음으로 성을 지킬 것을 다짐한 뒤 모든 사람을 성안으로 불러들이는 등 준비를 마친 뒤 남문루로 올라가서 적을 기다렸다. 적의 정예대군과 조총(鳥銃)을 포함한 우수한 무기 앞에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소수의 병력과 조잡하기 짝이 없는 무기 뿐, 오직 성벽에 의지하여 죽음으로써 싸울 수밖에 없었다.

농주산(弄珠山 : 지금의 동래경찰서) 취병장(聚兵場)에 집결한 적의 주력부대와 4월 14일 저녁 무렵부터 대치하게 되었다. 적진에서 우리 측이 대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전의(戰意)를 살펴보려고 백여명의 병졸이 목판(木板)에 글을 써서 남문 밖에 세우고 갔다. 군관 송봉수(宋鳳壽)를 시켜 가서보게 하니 그 목판에는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거든 우리에게 길을 비켜달라[전즉전의 부전즉가도(戰則戰矣 不戰則假道)]」고 씌어 있었다.

송상현은 이에 대해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고 써서 적에게 던졌으며, 죽음을 이미 초월하여 다만 성과 운명을 같이할 결심을 더욱 굳혔다. 적은 항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세 갈래로 나누어 성을 포위하고 조총과 화살을 난사하였다. 이튿날인 4월 15일, 적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인생문(人生門)으로부터 파죽지세로 쳐들어왔다. 이른 아침의 일이었다. 성민들은 일치단결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12시경에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송상현이 만약 정발처럼 무인출신이었다면 칼을 휘둘러 적을 죽이다가 장렬한 전사를 했을 것이나, 문관출신인 그는 무장으로서의 훈련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죽음도 무관다운 것이 아니고 문관답게 죽어간 것이다.

성은 이미 함락되었다. 쓰러진 성민들의 시체를 밟고 피에 굶주린 듯 밀려오는 왜적들, 그러나 송상현은 동요하지 않았다.

앞서 종자(從者) 신여로(申汝櫓)를 불러「나는 이것을 지켜야 할 신하이니 의리상 마땅히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지 못할 것이다. 너는 노모(老母)가 있으니 헛되이 죽어서는 안된다. 빨리 떠나라.」고 하던 그는 적이 성을 넘어 들어와서 성내를 유린하자 오히려 조용히 집에 연락하여 조복(朝服)을 가져와 갑옷 위에 입고 투구를 벗고 사모를 쓴 뒤 호상(胡床)에 기대어 손을 모으고 단정히 앉으니 그 우뚝한 모양이 산과 같았다.

얼마 뒤에 적이 들이닥쳤는데 그 가운데 평조익(平調益)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통신사 평조신(平調信)을 따라 왕래할 때 그를 만난 일이 있고 또, 후히 대접받은 일이 있었으므로 그 후의에 보답하고자 성 옆 빈터로 우선 피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로 거절하고 일어나서 전패(殿牌)를 모신 객사를 향해서 북향하여 네 번 절했다. 그런 다음 부채에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다른 진영(鎭營)에서는 도와줄 기척도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무겁고 부모와 자식의 정은 가볍습니다.」라는 비장한 시(詩)를 써서 아버지에게 보내고 42세를 일기로 호상에 앉아 의연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부하에게 남기는 말로 「내 허리 밑에 콩 만한 사마귀가 있으니 내가 죽거든 이것을 표시로 삼아 내 시체를 거두라.」고 하였다.

이러한 동래읍성의 참상과 송공(宋公)의 모습을 훗날 사람들은 시(詩)로 읊었다. 동래부사 이안눌(李安訥)은 4월 15일 아침에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들리거늘 어찌된 일이냐고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아전이 말하기를 「그래도 울 수 있는 사람은 괜찮습니다. 일가가 모두 죽어서 울 사람조차 없는 자는 더욱 슬픈 일입니다 .」고 했고, 역시 동래부사 윤훤(尹暄)의 시에는 「강상(綱常)은 우주의 동량(棟樑)과 같은데, 공이 홀로 붙들어 잡았으니 죽어서도 헛되지 않도다…….」고 했다.

이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송상현의 문인다운 모습을 기리고 있다. 그의 행장과 전기, 비문을 쓴 이도 또한 문관들이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철저한 의리와 충신(忠臣)의 문관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비록 정발과 같이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음을 초월한 강인한 의리의 정신은 곧 선비의 정신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행장에서는 공의 인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은 덕성(德性)이 깊고 두터우며, 도량이 크고 넓어 일이 있은 후에 말하고 희로(喜怒)를 나타내지 않았다. 항상 경전(經傳)에 침잠하고, 자사(子史)에 깊이 통하였으며, 널리 병가류(兵家類)에까지 미쳤다. 그 집안에서의 행실은 순순하고 독실하여 어버이가 계시면 비록 모진 추위와 더위에도 갓과 띠를 벗지 않았다.
동생 상인(象仁)과는 우애가 지극하였고, 큰 누님이 일찍 과부가 되어 여러 자식을 거느리고 공에게 의지했는데, 공은 모시기를 매우 삼가고 그 아이들을 보살펴 양육함이 자기 자식과 다름이 없었다. 그 집을 다스림에는 법도가 있었고, 자애로움이 두루 흡족함에 집안 사람이 그 위엄을 두려워하고, 그 은덕에 복종하여 삼가고 유화한 교화가 있었다. 벼슬길에 오름에 항상 평온하고 조용하며, 일을 당하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아첨하지 않았다. 그 절의를 다함에는 조용히 앉아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 평상시와 같았으나, 그 배움이 바르고, 배양함이 깊고, 의리와 불의를 분간할 줄 알았다. 이것은 평소에 마음 속에 정해져 있음이라. 하루 아침에 비분강개하여 몸을 죽이는 자와는 비교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항복(李恒福)은 의령에서 송부사의 반장(返葬 : 객지에서 죽은 이의 시체를 고향 등으로 옮겨 장사지냄)을 맞이하여 조제(弔祭)하기를 「외로운 성을 달무리처럼 적이 포위하였는데 담소하면서 지휘함은 공의 충렬이 아니겠는가. 남문루에 자기(紫氣)가 우러러 북두성 (北斗星)을 쏘고 있음은 공의 정기가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자줏빛 정기로 타올라 북두성에 치솟고, 허공에 머물러 길이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거룩한 정신은 저 신라 문무왕이 해중용왕(海中龍王)이 되어 왜적을 섬멸하겠다는 호국의 정신과 상통하는 바 있다.

정발이 무인답게 용맹을 떨쳐서 적을 위압하고, 죽어서 원귀가 되어 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다짐한 데 대하여 송상현은 문관으로서 태산과 같은 기개와, 바다와 같은 도량으로 적을 감화하고 백성들을 교화하며, 의연히 순국하니, 적도 그를 해친 자를 죽이고 그의 장사를 정중히 하였으며, 그의 반장(返葬)을 보고서는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였다.

더욱이 사야가(沙也可)와 같은 왜장은 군자국(君子國)의 예절에 감복하여 부하와 같이 항복하고, 모화당(慕華堂) 김충선(金忠善)으로 이름을 하사받아 우리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또한 백성들이 어버이처럼 섬겨 모두가 성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되니 그의 감화와 정신은 이 땅 위에 영원한 귀감이 되는 것이다.
동래의 전황(戰況)과 송상현의 공적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숙종 7년(1681)에 정발과 같이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홍문관 대제학(弘文館 大提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官)을 증직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내렸다.

처음에는 동래의 송공사(宋公祠)에서 제향하다가 기일(忌日)에는 송공단(宋公壇)에서 제향하고, 송공사는 충렬사(忠烈祠)로 사액되어 지금의 안락동(安樂洞)에 옮겨 서원(書院)의 예에 따라 춘추로 제향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밖에 송상현을 제사지내는 곳은 고부 정충사(古阜 旌忠祠)와 청주 신항서원(淸州 莘巷書院), 개성 숭절사(開城 崇節祠), 경성 화곡서원(鏡城 禾谷書院) 등이며, 이 밖에 임금이 친히 그 가묘(家廟)와 묘소(墓所)에 여러 번 제문을 내려 제사지냈고, 묘소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우고, 동래에는 충렬비(忠烈碑)를 세워 오늘에 전하고 있다.

송상현의 묘는 청주 가포곡(加布谷)에 있다. 반장(返葬)은 가인(家人)의 요청으로 조정에서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적진 중에서 행하게 되었는데 많은 동래부민(東萊府民)들이 백리 밖까지 전송하였으며,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도 부하들과 함께 말에서 내려 숙연히 전송했다고 한다

- 출처 : 동래구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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